석굴암 1/5 모형은 8세기 중엽 당시 신라재상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석굴암이 세상에 알려진것은 1907년 일본인 우체부...


한 나라가 천년동안 한 번도 수도를 옮기지 않고 국가를 통치해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도읍의 입지 조건에 적합한 자연조건과 도시를 수도적 기능에 맞도록 오랜 세월을 두고 합리적으로 구축해 왔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고있는 천년전 王都는 고분, 몇기의 탑, 절터, 그리고 산야에 흩어져 있는 불상 그것이 마치 신라문화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걸어다니고 있는 이 길이 천년전 신라 王城의 그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득한 고대 도읍의 찬란했던 모습을 그려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행히 경주는 천년동안 지켜왔던 왕도의 遺址와 문화유산이 지금까지 비교적 잘 전해지고 있어 그 규모나 도시의 패턴을 짐작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능묘의 분포, 사찰과 탑, 불상 등의 석조물 그리고 “井”자 형의 도로 구조는 그 좋은 예가 되며, 더우기 근래 발견된 왕경지역의 建物遺址 조사는 당시의 도시계획을 연구 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필자는 역사가도 고고학자도 아니다. 다만 40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 어릴 때 뛰어 놀던 산천과 洞里, 그 속에서 느껴온 역사의 향기와 여러 사학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신라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감명깊게 가슴속에 지녀 온 작은 화가일 뿐이다. 필자의 이런능력을 잘 알면서 어느날 신라역사과학관 석우일兄께서 나를 불쑥 찾아왔다. 그 때가 1991년 11월이었고 건강도 별로 좋지 않을 때였다.

김동현박사(문화재연구소장)의 설계로 그렸다는 신라왕경조감도의 흐릿한 사진 한 장과 왕경에 관한 자료 몇 권을 가지고 왔다. 兄은 무조건 동양화 기법으로 연구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그려보라는 말과 함께 그 크기는 가로 6m, 높이 2m 50㎝정도로 하자고만 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척 당황했으며 그날 이후 무거운 짐을 지고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곧이어 12월, 겨울이 오는 바람 센 어느 날 남산의 해목령 바위에 올라 그 옛날 경주를 생각하며 몇 년이 걸려도 한번 그려 보리라고 결심하였다.

寺寺星張 塔塔雁行’《三國遺事》 第三卷, 興法第三
第四十九 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北屋連牆 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三國遺事》 弟二卷 處容郞 望海寺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覆屋以瓦 不以茅 吹飯以炭不以薪 有是耶’《三國史記》卷十一, 憲康王 六年


절과 절이 별처럼 벌여있고 탑들은 기러기떼인 양 줄지어 있으며 서울에서 지방(海內·京畿지역)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은 연이어졌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거리에는 음악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성중의 공해를 염려하여 숯을 연료로 사용토록 할 정도로 대궐과 사찰, 관아, 민옥들이 즐비한 거대하고 화려했던 불교도시였음을 古典은 잘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세계적인 역사 문화도시에 살고 있다. 중국의 長安城, 일본에는 平城京이 있어 자기네 나라가 고대 문명국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에겐 경주가 있다. 일본의 고대 문화가 우리에게서 전해진 것이 분명히 밝혀진 지금, 경주는 그들보다 훨씬 앞선 문화의 王京을 구축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을 긍지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오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역사의 유산을 지하에 간직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제 조금씩 그 베일을 벗으면서 어렴풋이나마 당시의 王都를 좀더 가까이 상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신라왕도의 시가지는 당나라 장안(長安)의 제도를 채용해서 완성되었으며, 당시의 도시계획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주평야를 종횡으로 달리는 도로망에 그여운을 남기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도의 시가지는 자비왕(慈悲王) 22년(469)에 비로서 방리명(坊里名)이 정해졌으며, 소지왕(昭知王) 12년(490)에는 처음으로 왕경(王京)내에 시장이 개설되었고 그로부터 20년 후인 지증왕(智證王) 10년(509)에 동시(東市)가 설치됨으로써 양시(兩市)의 제도가 완비되었다.

즉 6세기 초인 지증왕대에는 이미 왕도의 도시계획이 상당히 구체화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국력의 비약적인 발전에 따라 실시를 보게된 이러한 왕도의 도시정비작업은 그 대상 지역내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돼 온 고분군의 무제한적인 팽창을 그 이상 방임할 수는 없었다고 짐작된다. 신라왕도의 도시계획이 진전을 보게된 지증왕대를 거쳐서 다음에 왕위를 계승한 법흥왕(法興王, 514∼540)이 승하한 이후로는, 왕의 능묘는 평야를 떠나 산지에 조영(造營)된 사실을 우리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여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신라 평지 고분군, 적석목곽분들의 종말기는 종래 생각해 온 바와는 달리 좀 더 일찌기 맞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윤무병《역사도시경주》) 경주는 지리적으로 동쪽이 높은 선상지로서 서남쪽은 물이 풍부하여 농경생활에 적합한 주거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석기, 경주전문대) 실제로 작년 말까지 발굴 조사된 재매정지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었다는 사실로서도 월성의 서편지역 일대는 이미 삼한시대 이전부터의 중요한 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시조 박혁거세의 陵址가 月城의 서남쪽 蘿井이라는 점과 인근의 창림사 부근을 초기 금성의 영역으로 보는 설이 있어 이 일대를 六村의 하나인 돌산 고허촌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불교유입의 초기 興法時代의 사원이 대략 월성 서편에서 서천을 따라 건립된 점은 도시의 발전이 월성 서쪽에서 월성 동쪽내지 북쪽 그리고 현 시가지 중심지역으로 확장계획이 이루어졌으리라는 설에 맞추어 왕도의 남북축을 설정, 그 규모를 상정하였다. (圖 1 참조)

이미 일제시대에 일부 발굴이 되었고 작년 말까지 어느 정도 건물지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 속칭 성동동 전랑지의 遺址와 첨성대 남편 지역에서의 건물지의 구조, 배치양식이 남북 長廊의 특징적 패턴임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예를 김 병모씨는 신라의 왕경구도가 남북대로를 중심축으로하여 계획된 址割의 증거라고 보았으며, 건물은 궁궐, 신전, 관아 등 규모가 큰 것일수록 방향과 배치 양식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신라왕도의 도성계획이 월성을 중심으로 한 남북대로의 축을 설정하게 되는 중요한 자연조건은 동쪽의 낭산과 명활산, 서쪽의 능묘지대와 서천 및 선도산의 위치가 될 것이다. 이것은 도로와 사찰의 분포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 그러면 신라왕경의 규모에 대한 역사 문헌을 근거로 도성의 범위를 想定하여 보기로 한다.

《三國史記》王都 長三千七十五步 廣三千一十八步 三十五里 六部
《三國遺事》京中十七萬 八千九百三十六戶 一千三百六十坊 五十五里
……… 城中 三百六十坊 十七萬戶

우선‘里’와 ‘部’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여 아직 명쾌하게 결론이 나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里를 部의 하부 행정단위로 보고 6부 아래 35리가 있으며 里는 또한 坊과 같은 의미로 해석(윤무병, 圖2)하기도 하며, 里아래 다시 소단위의 坊이 존재하는 것으로도 추정된다. 왕도의 길이와 폭을 어떻게 설정하여 측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주의 지형상 통상 長은 남북, 廣은 동서로 보아 둘다 3천보가 조금 넘으므로 거의 정방형의 都城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본다.



1步=6尺, 1里=300步(尺廣綜考所 ‘井田圖’에 의함)이므로 3018보÷300은 약 10리가 된다. 그러니까 경주는 당시 도시계획이 坊格으로 잘 정비된 지역은 동서, 남북축의 거리는 10리 정도라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현 경주 시가지의 동서길이(경주중학교 앞 도로를 기준으로)가 약 4㎞로 측정됨으로 1尺≒23㎝(米田美代治의 환산 周尺에 의함)로 계산했을 때 3,018보×6척×23㎝÷4.16㎞…… 도성의 둘레는 대략 40리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중고시대에 이미 大宮, 梁宮, 沙梁宮을 비롯한 궁궐이 있었고 흥륜사, 황룡사를 비롯한 가람과 능묘가 산재한 가운데 왕도인들의 주거지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면 대략 선덕왕대에 완성된 황룡사 2차 가람에서 坊의 계산에 의한 도시계획이 상당히 이루어져 왕도의 범위가 거의 확실시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미 문무왕대에 서울을 새로 만들려다가 의상대사의 충고로 新京城을 만들지 못하였다는 기록이나 문무왕이 월성 동북편에 月池宮을 확장 공사한 사실, 孝昭王 4년(695)에 西市, 南市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략 7세기말에 王京도시 확장이 이루어져 月城, 滿月城, 金城을 포함하는 전역을 京城의 개념으로 도시계획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왕도의 방에 대한 地割은 황룡사 동편의 왕경지구 발굴에서 드러난 건물지와 도로의 유구로 추정할 수 있는데 현재 가장 확실하게 남아 있는 다른 두 곳과 비교하여 1개의 坊(편의상 최소 단위의 한 地區)에 적용된 면적을 비교 추정하여 보기로 한다. (圖 3 참조)

① 황룡사 동편 신라시대 건물지 遺址
② 경주 읍성내의 한 坊(읍성 전 면적의 1/16 - 圖 3 참조)
③ 분황사 서편(현 화랑초등학교 앞 주거지)

①의 동서 길이는 160m, 남북은 140m로서 남쪽은 15.5m, 동쪽은 5.5m폭의 도로로 구획된 주거지역으로 이해된다.

②는 고려초기에 축성된 읍성으로서 周圍는 약 24.12m(김태중의 산출)로서 한변의 길이가 대략 600m로, 남쪽이 약간 좁은 정방형에 가까운 구획안에 동서남북으로 정연한 도로망을 구축하고 있어 왕경시대부터 이룩된 도시계획을 이용하여 축성했다는 주장이 강하여, 최소단위의 1개坊은 도로를 포함하여 대략 150m×150m의 규격으로 조직되었으며, 성이 16개의 小坊으로 이룩되었음을 보여준다. 200년 전쯤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경주 읍성도’에는 1,904戶의 성내 戶數가 기록되어 있다.

③은 경주시에서 문화재 보호구역 주변지역으로 미관지구로 지정되어 개발이 안된 곳으로 일제때의 지형도와 현재의 지적도 상에서도 한 坊이 140m×140m(도로제외)로 추정되며 이는 戶數와도 연관 지을 수 있다고 본다. (圖 4 참조) 따라서 위의 3개 지역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략 140m∼160m의 범위 안에서 구획된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坊의 크기는 1916년에 제작된 지도에서도 규칙적인 井田형의 도로가 잘 나타나고 있다. (圖 4 참조)

다음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戶數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써 도시의 규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고자한다. 경주 읍성내의 호수는 1,904호이므로 이를 16개의 坊으로 나누면 119호가 1개방의 호수가 되며, 이는 현 화랑초교 앞의 1개방의 세대별 필지수 100∼110과 비교하여 보면 대략의 호수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개발되지 않은 현재의 지역에서나 조선시대 후기의 일정한 지역의 비슷한 규모의 주거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조선 현종대의 전국주요 도읍의 戶數와 人口를 살펴보면 (《顯宗改修實錄》)

지역 호수 인구 호당인구
전국 1,186,634 4,730,937 4.0
한성부 24,800 192,154 7.7
한성부 24,800 192,154 7.7
경기 107,186 469,331 4.3
호서 178,444 469,331 3.6
영남 265,800 960,060 3.6
 (현종 13년, 1672)

그러면 여기서 三國遺事의
가) 京中 178,936戶 …… 1,360坊〈1坊≒131戶>
나) 城中 360坊 …… 17萬戶 〈戶…?〉
를 자세히 살펴보면 가)의 방에 대한 호수는 대략 앞의 예를 기준으로 비슷하게 맞아떨어지지만, 나)는 계산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이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나)의 경우 천단위가 탈락된 오기라고도 보아왔다. 그러나 필자는 〈360방×120호×4명=172,800명〉이라는 계산에서 나)의 17만호는 17만명으로 보아온 일부 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싶다.



그러면 가)가 모두 타당성을 지닌 기록이라고 본다면 1.360방(京中)은 수도권 전역을 포함하는 王畿의 숫자로, 城中 360坊은 三宮城을 둘러싼 王都의 城邑內 산곡간 분거도시 周圍 약 40리 이내의 井格으로 계획된 범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圖 1 참조) 신라의 왕경은 대체로 하나의 소국인 사로국 영역을 토대로하여 편제된 신라의 수도이다. 그런데 이같은 왕경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그 하나는 사로국 형성시에 생겨났던 왕실세력의 거주지들을 포함한 정치 중심구역이 점차 확대되어 하나의 도시로 발전하였던 왕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왕도는 長이 3,075步이고 廣이 3,018步 였다고 한다. 한편 왕경지역에서의 왕도를 제외한 지역은 대체로 王畿라고 불렀다고 여겨지며, 이 지역은 사로 육촌을 모체로 하여 6部가 편제 되었다고 본다. 이는 곧 통일이후의 백제, 고구려에서 투항해 온 일부 귀족계급의 주거 지역이 되기도 하였다. 이미 설명한 지역구분에서와 같이 왕도에는 3궁을 비롯한 궁성들, 행정관청, 동시전, 서시전과 같은시장, 사찰과 능묘 그 속에서 왕도인들은 같이 살면서, 왕을 배출하던 성골집단은 왕궁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왕도는 古典의 기록에서와 같이 인구가 밀집되고 가가호호가 연이어진 복잡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 “屋舍條의 禁令”에서와 같이 眞骨은 24尺을 넘을 수 없고 六頭品은 21척, 五頭品은 18尺, 四頭品에서 평인까지는 15尺 이상 집의 길이를 넘을 수 없도록 규제한 조항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

왕기지역의 범위에 대하여는 대체로 왕경변방의 城을 기준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毛火郡에 關門을 세웠다 (772년)는 기록이 있는데 모화촌은 경주 東南境에 있으며 관문성의 주위는 6,792보 였다고 한다. 〈박방용 논문〉 관문성은 동의 신대리성과 이어져 신라왕경의 동남방을 지키는 중요한 성이었다고 보여지며, 감포의 팔조산성, 포항입구의 북형산성, 서쪽의 부산성은 왕경을 수호하는 지역의 경계라고 보아야 하겠다. (圖 1 참조) 이는 곧 중국의 장안성, 일본의 평성경이 羅城인데 비하여 신라왕경은 주위의 여러곳을 城郭城으로 구축하게 되는 특수성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아직도 1,300여년 전에 만들어진 그 길 위를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상 도로가 새로 넓혀지고 택지가 조성되면서 예날의 자취가 훼손된 것은 근래 몇 십년 동안에 이뤄진 것일뿐 일제때 만들어진 지도에서 보듯 경주는 천년이 넘게 잘 보존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선조들이 지혜롭게 이루어 놓은 이 땅에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고도의 문화유산을 파엎어 놓아 위대했던 문명도시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경주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연연해서는 안된다. 보이는 유산은 잘 보호되어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 더 큰 것은 지금부터라도 정확히 규명되도록 철저히 연구되어야 한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더욱 큰 상상의 즐거움과 역사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고도 볼 수 있다. 경주는 우리 민족의 문화가 시작되어 그 원형을 이루어 놓은 곳이다. 이 곳을 찾는 이들은 아득한 우리 역사 문화의 향수를 만끽하면서 쉬러 오는 곳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지니고 있는 역사의 古都, 문화유산의 실체를 감명깊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하여 먼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 가게 할 수 있는 감동이어야말로 진정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양식이 될 것이다. “경주는 개발하지 않는 개발이 가장 현명한 개발이다” 라고 말한 어느 고고학자의 말을 되새긴다. 역사에 대해선 별로 지식도 없는 필자가 감히 여러 사료를 들먹이면서 나름대로의 추정을 한데 대해선 무척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王京圖는 일종의 illustration(예증을 위한 그림)으로서 자료를 평면도형으로 제시하는 성격의 그림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더 많은 발굴 자료와 역사가의 논문이 나와서 제 2, 3의 정확성을 기하는 왕경도가 나와 주기를 바라며, 혹 자료의 이용이나 추정이 어긋난 점은 꾸짖고 바로 잡아주기 바란다.

끝으로 2년여에 걸친 왕경도 제작기간 동안 대형의 화면을 처리할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하여 주신 이 상렬 경주 문화원장님, 발굴도면과 경주 문화유적에 대한 자료제공과 가르침을 주신 신 창수 경주 문화재연구소 학예실장님, 수시로 고분과 사찰에 대한 자료와 의견을 주신 이 근직 경주 사학회 회원, 그리고 누구보다 가까이서 각종 자료를 제공하여 주시고 오류를 잡아주신 고청 윤 경렬 선생님, 김 태중 신라문화동인회 회장님과 김 원주 경주 박물관회 회장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동안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사찰 복원도에 큰 몫을 한 불교 미술가 이 종수씨, 山그림에 뛰어난 이 준환군, 끝까지 완성에 참여하여 준 박수미양께도 고마움의 말씀을 전한다.

1994년 3월21일

글쓴이 李在健(慶州美協會長·경주전문대)
공동연구자 昔宇一(新羅歷史科學館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