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1/5 모형은 8세기 중엽 당시 신라재상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석굴암이 세상에 알려진것은 1907년 일본인 우체부...
물시계의 원리
4급보상식 부전누란 4단 위에 각각 놓여진 4개의 흐르는 물통(漏壺)에서 부표(浮漂)에 꽂힌 잣대(浮箭)로 수위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얼마나 변화하는가를 잣대의 백각(百刻) 눈금을 통하여 알게하는 장치이다. 이 때 전호(箭壺=水海)의 수위가 올라가는 양 만큼 누호의 수위는 내려간다. 누호의 수위가 점점 더 내려가면 수압은 점점 더 약해진다.



따라서 출수량도 감소하고 전호의 수위도 그 양에 비례하여 늦게 올라가 시간은 늦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기게장치를 할 수 없었던 신라시대에는 사람이 직접 되박을 이용하여 물을 누호에 공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시계의 역사
중국 한(漢)대에 하나(1급보상식)의 누호와 부전에서 출발한 물시계는 그후 둘(2급보상식), 셋(3급보상식), 넷(4급보상식)으로 그 재료의 종류도 도제에서 동제로 또 목칠제로 다양하게 개량되어 왔다는 기록이 있다. (同旭 의 「中國漏刻」참조) 한국의 문헌에서는 물시계에 관한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권에 신라 성덕왕 17년(718)에 처음 나타나지만( 夏六月 始造漏刻) 동 제9권에는 경덕왕 8년(749)에 천문박사 1인, 누각박사 6인을 두었다고만(三月 置天文 博士一員 漏刻博士六員) 기록되어 있을 뿐 누각의 형태나 종류 조차도 알수 없고 누각의 제원, 기능, 구조등에 대해서도 일체 기록된 것이 없다.

아마도 이 기록은 그 이전의 물시계를 개량하여 3급보상식 누전 이상으로하고 누각박사도 보충하여 누각전에서 관리하게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전상운의 「한국과학기술사」참조) 그 이유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으리라고 믿어지는 천지(天智)10년(671)에 물시계가 제작되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시계의 제작
국립충북대학교 천문우주학과 정장해교수는 중국 당나라 여재(呂材)의 4급보상식 부전누(627∼649)를 연구(위에서부터 夜天池→ 日天池→平壺→萬分壺→水海)의 근거로하여 신라의 물시계 설계도를 만들고 동과의 이용삼교수는 하루를 12등분한 십이간지(十二干支) 의 시진(時辰)과 이를 100등분한 백각눈금표, 그리고 4계절 24절기에 따라 밤의 길이가 변화하는 오경(五更) 25점(点)의 눈금과 위치를 설정한 도표를 주었다.

이에 신라역사과학관 연구팀은 작업도면에 따라 4개의 목칠제 물통과 11개의 나무로 만든 잣대에 눈금을 새겨 넣을 수 있었다. 특히 잣대의 밑 부분이 동판으로 만든 거북모양의 부표 중심 등허리에 정확히 꽂혀 있을 뿐만아니라 교환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기능장치를 해 두었다. 그래야만 전호로 입수되는 수량(水量)에 비례하여 부표는 스스로 떠 오를 수 있다. 떠 오른 눈금의 표기는 부전의 뚜껑 위에 서있는 동자상(童子像)의 양손이 가르키는 횡면을 기준으로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종소리로 물시계의 시간을 알림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역사 시대로 진입하면서 물시계로 측정된 시간을 알리는 방법으로 종과 북 그리고 징 등을 이용하였다. 물시계가 사용되던 신라 당시에는 무엇으로 얼마만큼의 거리를 한계로 시간을 알렸는가에 관한 문헌기록은 물론 없다. 그러나 동시대의 일본 아스카자료관의 물시계복원도는 우리에게 종을 선택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컸다.

신라역사과학관 연구팀은 우선 첨성대가 만들어졌을 즈음에는 물시계도 그 앞에 있었으리라 상정하고, 사방 2km정도의 동심원을 그려보니 궁궐이 있었던 월성의 동서 끝과 주작대로의 북쪽 끝까지가 한계점으로 잡혔다. 지상 5m정도의 높이로 종각을 세우고 종을 친다면 대략 직경90cm,높이 167cm의 상원사 동종 크기로 이 지점까지는 무난하게 종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하고 비정(比定)하게 되었다.(상원사 동종 725년 제작)

또한 물시계가 사용되던 그 시대의 양식을 갖춘 종은 현재 경주 근방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 동종을 실물 크기로 복원하여 여기에 달게 하였을 뿐이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