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1/5 모형은 8세기 중엽 당시 신라재상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석굴암이 세상에 알려진것은 1907년 일본인 우체부...
첨성대 요약
국보(國寶) : 31호
소재(所在) : 경주시 인왕동(慶州市 仁旺洞) 839의 1, 옛날에는 경주부남(慶州府南) 월남리(月南里) 계림 북방(鷄林 北方) 약 150m, 내물왕릉(奈勿王陵) 북동방(北東方) 약 300m 근방, 俗名 비두골
연대(年代) : 신라(新羅) 제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6)



첨성대의 기능(瞻星臺의 機能)
첨성대에 대하여서는 규표(圭表)의 일종이니, 천문사상(天文思想)과 지식을 상징(象徵) 하는 기념비적(記念碑的)건물이니, 불교(佛敎)의 영향을 받은 종교적(宗敎的)인 제단(祭壇) 이니, 도시계획(都市計劃)의 기준점적(基準點的) 축조물(築造物)이니, 실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구조로 보아서 또 고대 천문학(古代 天文學)이 오늘과 달랐다는 점으로 보아서 이는 더 소박(素朴)한 천문관측대(天文觀測臺) 였을 것이 틀림없다.

즉 첨성대 외부 지상으로부터 중앙 개구부까지 사다리를 따라 올라가서 내부(內部)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2단에 걸친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을 의지한 2개의 사다리를 통하여 상부 정자형 두부(上部 井字形 頭部)에 올라간다. 그 다음에 상단의 서반부(西半部)에 걸친 개폐식판(開閉式板)을 딛고서 하부와 차단한 다음에 충분히 넓은 공간에서 국가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천문관측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첨성대의 그 뛰어난 조형미(造型美)와 그 견고(堅固)한 축조기술은 모든 사람이 찬탄(讚 嘆)하는 바이며 고대 천문대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것의 하나이다.

첨성대의 옛 문헌 (瞻星臺의 古文獻)
《삼국유사》 기이(紀異) 권 2의 별기(別記)
- 이 왕대(王代)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
《삼국유사》 왕력(王歷) 제 1에 신라 제 17대 내물마립간(奈勿痲立干) 이야기 끝
-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에 있다.
《고려사》 권12 지리지(地理志)
- 또 첨성대가 있다. 신라 선덕여주(善德女主)가 쌓은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권 150 경주부
- 첨성대는 부(경주부)의 월남리에 있다. 633년에 선덕여주가 쌓은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조, 《동경잡기 東京雜記》 권 2 고적(古蹟)
- 첨성대가 부의 동남 3리 되는 곳에 있다. 선덕여주때에 돌을 다듬어 대를 쌓 은 것인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다. 높이는 19척으로 속이 통해 있어서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관측을 한다.
《증보문헌비고》 상위고(象緯考) 2, 의상(儀象) 1
- 신라 선덕왕 16년(647)에 첨성대를 만들었다. 돌을 다듬어서 대를 쌓은 것인 데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고 높이는 19척 이다. 그 속이 통해 있어 사람 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한다. 경주부 동남 3리에 있다.

첨성대의 구조 (瞻星臺의 構造)
전체가 기단부(基壇部), 원주부(圓柱部), 정자형두부(井字形頭部)의 3부분으로 되어있다. 첨성대 전체의 석재는 화강석(花崗石)으로 총 석재수는 365개 내외이며 기단부, 원주부의 외벽 정자형 두부는 모두 다듬어져있다. 원주부의 내벽은 다듬어져 있지 않으나 마찰(摩 擦)로 약간 마모(磨耗)된 흔적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1. 기단부는 4각형 상하(上下) 2단
① 상단(上段) - 1변이 5.18m, 높이 39.5cm, 석재수(石材數) 12개
② 하단(下段) - 1변이 5.36m, 높이 39.5cm, 석재수 8개
③ 방향 - 남변(南邊)이 정남(正南)에서 동쪽으로 19°

2. 원주부는 총 27단으로 높이는 8.05m의 술병형
① 최하단의 둘레 16.0m, 제14단의 둘레 11.7m, 최상단의 둘레 9.2m
② 13단에서 27단까지의 속이 비어서 사다리 2개를 중간의 장대석에 걸쳐서 상하로 오 르내릴수 있게 되어있다. 27단을 지나서 정자형 두부로 올라가면 목판으로 서반부 개구를 덮어서 하부와 차단할 수 있는 구조이다.

3. 정자형 두부는 상하 2단의 정(井)자형 구조
① 각단이 각각 306×32×32cm의 크기의 장대석 4개씩으로 정자형으로 이뤄졌다.
② 정자석 내부는 220×220×64cm의 공간을 이루고 하부는 목판을 깔았던 것으로 생 각되며 그 서반부는 개폐가 가능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