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1/5 모형은 8세기 중엽 당시 신라재상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석굴암이 세상에 알려진것은 1907년 일본인 우체부...


세계 최초로 발명되어 빗물을 측정한 기계이다. 조신시대는 농업을 천하지대본이라 하여 국가의 큰 정책으로 삼았다. 지금처럼 공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관개시설이 지금처럼 잘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비가 적게 와서 가뭄이 들어도 걱정,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가 되어도 조절할 방법이 없었다.

비가 왔어도 부족한지, 지나치게 너무 왔는지, 이 모두가 조정의 큰 관심거리였다. 한양에 있었던 서운관을 비롯해서, 지방 관청은 온 다음 땅을 파서 빗물이 얼마나 깊이 스며 들었는지 깊이를 재서 승정원에 보고하였었다. 농작물에 필요한 양인지의 여부를 알아 보기 위한 좋은 방법이었으나, 빗물이 땅 속에 스며 들어 가는 깊이는 흙의 상태 여하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흙이 얼마나 굳어 있는지 또는 모래가 얼마나 섞여 있는 흙인지에 따라 빗물이 스며드는 깊이는 같은 양의 비가 내렸다 하더라도 서로 다를 것이므로 정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비가 올 때마다 흙을 파 본다는 일도 여간 번잡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종대왕은 좋은 방법을 골똘히 찾고 있었다.

이 일은 세종대왕만의 숙제는 아니었다. 서운관 관원은 말할 것도 없고, 궁궐 안에 출입하던 많은 사람들도 다 함께 걱정한 일이었다. 그런데, 좋은 방법이 호조에서 제안되었다. 높이 2척, 지름 8촌 되는 크기의 그릇을 쇠로 만들어서 대 위에 설치하여 비가 오면 서운관 관원으로 하여금 그 깊이를 재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세종대왕은 참 좋은 생각이라고 받아 들이고 즉각 제작하도록 명하였다.

이때가 세종 23년 8월 18일로서 1441년 8월 28일에 해당한다. 그로부터 약 9개월 뒤인 세종 24년 5월 8일(1442년) 에는 그릇의 크기를 높이 1척 5촌, 지름 7촌으로 약간 줄이고, 그릇의 이름을 측우기라고 정하였다. 세종대왕이 승하한 후에도 이 측우기는 계속해서 사용되었지만 어느 시대에 와서 인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길이 없지만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수백년이 지나는 동안 측우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대단히 애석한 일이다.

세종대왕으 측우기가 다시 세상에 태어난 것은 조선시대의 두번재 과학시대를 개척한 영조대왕의 노력 덕분이었다. 영조대왕은 그의 재위 46년째인 5월 1일에 세종실록을 읽는 중에 측우기의 기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승정원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글로 써서 이르기를, 이번에 세종실록에서 측우기에 관한 기록을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노라. 무릇 비가 올 때마다 그럿에 받아서 놀던 어릴 때의
일을 이제 관연 듣는구나. 비록 기우시가 아니더라도 나는 수표를
보면서 물이 얼마나 흐르고 있는가를 알려고 했었으니, 이제 내
마음이 어더하겠는가.


불같은 성격을 가진 영조대왕은 세종실록에 적혀 있는대로 측우기를 즉각 만들 것을 명하고는 6일만인 5월 6일에 측우기를, 7일째는 빗물의 깊이를 재는 자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비기 오기를 기다렸다. 5월 13일자(1770년 6월 6일에 해당함) 승정원 일기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빗물의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밤 2경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여 14일 평명까지 측우기에 물의 깊이 1촌(약 22mm)이 되었다.

이 역사적인 기록으로 인하여, 한국의 서울은 1770년부터 비를 재기 시작한 유일한 도시로 과학사에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 전시한 측우기는 금영측우기를 본 따서 만든 것이다. 금영측우기는 본래 충남 공주에 있었던 것인데, 일본 사람들이 가지고 가서 일본 기상청에 보관하던 것이 1971년 반환되어 지금은 서울의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제24대 헌종 4년(1837년)에 제작된 것으로서 보물 제561호로 지정 받았다. 이 측우기는 구리로 되어 있고, 그 크기는 높이 315mm, 내경 139mm 이다. 몸체는 세 부분으로 분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무게는 약 7kg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