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1/5 모형은 8세기 중엽 당시 신라재상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석굴암이 세상에 알려진것은 1907년 일본인 우체부...
팔공산 군위 삼존불 석굴
국보-109호
본존높이-218㎝
관음보살높이-192㎝
세지보살 높이-180㎝
석굴높이-425㎝



우리나라 대부분의 석굴사원이 암벽에 마애불을 새기고 그 위에 목조 전실(前室)을 세운 소규모 석굴사원을 모방한 형식이다. 팔공산 군위 삼존석굴은 이미 생긴 자연동굴의 암벽을 더 뚫어 그 속에 불상을 안치한 본격적인 석굴사원이라는 점에서 인도나 중국의 석굴과 친근성이 있는 석굴이다.

다만 인도나 중국의 석굴에서는 뚫은 암산 자체의 돌에 불상을 조각하였으나 이 석굴에서는 지상에서 조각한 화강암을 20m 높이의 안산암 계통의 굴속으로 옮겼다는 점 등이 상이한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암산 단애(斷崖)에 석굴을 형성하였다는 점은 가장 원류에 충실한 최초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석불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수인을 갖춘 본존여래가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좌우에는 각각 중국 초당(初唐)의 양식적 영향을 받은 듯한 관음(觀音)과 세지(勢至)보살이 있어 아미타 삼존불(阿彌陀 三尊佛)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진홍섭 교수의 『석불』참고) 과연 항마촉지인 불상도 아미타여래로 볼 수 있을까? 신라 사람들이 우매해서 실수를 하였을까? 경전(經典)에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하는 혼란스런 의문이 일어난다.

더욱이 1998년에 본격적인 학술 조사를 한 강우방교수는 본존불의 수인은 완전한 항마촉지인이 아니며, 원래는 채색되었으리란 확증을 필름에 담을 수가 있었다는 등의 견해를 나타내어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참고』삼국말 내지 통일 초기에 만들어진 이 불상을 50여년이 훨씬 지나 저 토함산에 나타난 석굴암 본존불의 상호와 관련시키는 학계의 논쟁은 아직도 분분하다. (황수영교수의 『석굴암과 아미타불』)

그런데 왜 이 팔공산 뒷자락에 누구에 의해 석굴 불사가 있어야만 했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신동아』「우리문화 바로보기 제13회 p611」에 실린 최완수 선생의 글로 대신한다.

팔공산 군위 삼존 석굴이 생긴 까닭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그 영토를 차지하고 나서는 팔공산을 중악(中岳), 계룡산을 서악(西岳), 지리산을 남악(南岳), 토함산을 동악(東岳), 태백산을 북악(北岳)으로 설정하게 되니 통일 후 가장 먼저 중악의 위치를 확정하여 이를 성지화(聖地化)할 필요성이 절실했을 듯하다.

그래서 중악 기슭인 이곳에 자연 석굴이 있고 그 석굴 안에서 중악의 상봉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해 모시려는 생각을 해내지 않았나 한다. 더구나 이곳은 경주에서 백제나 고구려의 옛땅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길목이었다. 경주-영천-신령-부계-선산-상주로 해서 백제로 가거나, 신령-부계-함창-문경으로 새재를 넘든지 신령-부계-군위-비안-예천-풍기로 해서 죽령을 넘는 길이 모두 이곳을 거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동원된 장병들이 모두 이곳을 거쳐갔을 터인데, 전쟁터에서 죽고 다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허다했을 것이다. 이에 이들이 서방정토인 극락세계로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불사가 거국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절실했을 터이니, 문무왕이 그 8년(668) 11월5일에 고구려 정벌을 끝마치고 서라벌로 회군해 돌아오면서 이곳에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해 모시도록 명령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런 생각을 하도록 한 것은 원효(元曉, 617-686년)대사였을 듯하다. 앞서 밝힌대로 원효는 이 <아미타삼존상> 조성의 교리적 배경이 되고 있는 ‘불설관무량수경’에 대한 연구가 깊어 ‘불설관무량수경종요’ 1권을 지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인( 慈仁)현이었고, 요석공주에게 장가들어 문무왕에게는 매제에 해당하는 인척 관계가 되었으니 말이다.

(『신동아』「우리문화 바로보기」의 최완수 선생의 글)

단석산 신선사 석굴(斷石山 神仙寺 石窟)


단석산이란 이름은 국선(國仙)으로 추도된 김유신이 수도하던 중에 칼로 암벽을 쪼겠다는 전설에서 나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민간에 전해 오기를 김유신이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신검(伸劍)을 얻어 석굴 속에 들어가서 검술을 닦으며 큰 돌로 시험했는데 아직도 그 때의 잔돌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과연 그 때의 석굴(삼국유사의 중악석굴)로 비정(比定)할 수 있을까? 의문은 남는다.

그러나 첩첩산중 깊은 계곡의 팍팍한 등산로를 따라 이 곳 단애의 단석바위(약 10m) 3면( ?? 자형)에 서면 그 옛날 김유신과 화랑들이 금방 살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우견편단의 작은 여래 4구와 뾰족 모자, 향로, 버들가지 같은 지물을 가진 신라옷차림의 작은 공양인 2구의 경건한 모습 때문일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일까?

한발 더 그들의 뒤를 따라가 보면 왼쪽 무릅위에 오른발을 살짝 얹고 오른쪽 턱밑으로 손을 고인 듯 한 반가사유상이 우리를 마침내 미륵(약 7m)대불 삼존불로 인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석굴이 국선 김유신의 수도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멸이 심해 잘 판독할 수는 없지만 조상기(造像記)의 부분적이 명문 해독으로 이곳의 절 이름이 신선사이고, 미륵삼존불임이 밝혀졌습니다.

신선사의 신선은 곧 미륵선화(彌勒仙化)를 가리키며, 이 미륵선화는 화랑의 화신이므로 이 석굴은 국선 김유신과 그의 낭도들이 찾아와 미륵불을 신봉하던 호국 사찰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단석산 신선사 석굴에 관한 이설(異說)은 그 60리 동편에 마주하고 있는 토함산(745m) 석굴암처럼 학계의 논쟁이 분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