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와 명랑법사의 문두루법  
신라 왕실(혹은 조정)에서 직접 관리한 성전사원(成典寺院) 중 하나인 경주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가 올해 대대적인 발굴에 들어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황룡사지 발굴에 버금가는 대규모 신라 사찰터 조사 대상지로 지목하는 곳이라는 점이 사천왕사가 한국 불교사에서 갖는 위상을 짐작케 한다.

송의정 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올해 발굴 첫 삽을 뜬 사천왕사지 조사가 완료되기까지 향후 10년 정도가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올해 조사에서는 사찰 내 건물끼리 연결하는 복도 시설인 익랑(翼廊) 흔적을 확인한 데 이어 서탑(西塔) 터에 대한 조사가 급피치를 올리고 있다. 그 심초석은 이미 들어낸 상태이며, 정방형 기단 주변을 조사한 결과 각 변에 4개씩의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안치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문화재연구소는 이런 조사를 통해 사천왕사를 둘러싼 비밀의 상당 부분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사천왕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수록돼 있다. 이에 의하면 현재의 사천왕사 터가 자리한 경주 낭산 남쪽은 원래 신유림(神遊林)이라 일컬었다. 신유림은 글자 그대로 풀면 신들이 내려와 소요하는 수풀이란 뜻이다. 사찰이 들어서기 전에 이미 신성한 곳으로 인식됐음을 엿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런 신유림에 절이 들어서게 된 것은 나당 전쟁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즉, 당과 합세해 백제ㆍ고구려를 멸한 신라는 그 직후인 문무왕 9-10년(서기 670-671년) 누란의 위기에 봉착한다. 어제의 동지 당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이다.

이 위기일발의 순간에 구원투수로 등장한 이가 명랑법사(明朗法師)라는 스님. 명랑은 신유림에 임시 절을 세우고 문두루법(文豆婁法)을 시행하니 당군이 신라군과 미처 교전하기도 전에 거센 풍랑에 침몰해 버리고 말았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이에 주목해 불교사학계에서는 문두루법의 정체 해명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대체로 해명되기에 이르렀다. 문두루란 불교의 밀교(密敎)에 속하는 종교의식으로, 산스크리트 '무드라'(Mudra)를 음역(音譯. 소리 그대로 옮김)한 말이다. 의역(意譯. 뜻 옮김)해 한자로 옮기면 '신인'(神印)이다. 신인이란 글자 그대로는 신(神)이 내린 부절(符節), 혹은 신의 약속 정도로 풀어볼 수 있다.

문두루법의 구체적 실태에 대해서는 중국 동진(東晉)시대 천축(天竺)에서 건너온 승려 삼장 금시리밀다라(三藏帛尸梨密多羅)가 번역한 불경 '불설관정경'(佛說灌頂經)을 검토해야 한다. 왜냐하면 약칭 '관정경'(灌頂經)이라 일컫는 이 경전이 문두루법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이 관정경 권 제7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에는 부처가 사위국의 기수(祇樹) 정로(精盧)란 곳에 머물 때 제석천(帝釋天)에게 온갖 재액을 없앨 수 있는 방법으로 문두루법 등을 추천한다. 여기서 문두루는 '文頭婁'라고 표기한다. (삼국유사엔 '文豆婁')

부처는 이렇게 말한다. 문두루법으로 악귀를 굴복시키고자 하면 먼저 자신이 부처와 다름 없다는 생각을 지니고 불제자와 보살을 생각하고 오방대신(五方大神)을 생각한 후, 귀신의 이름을 적은 둥근 나무인 '문두루'를 잘 보이는 곳에 두면 어떠한 악귀도 범접할 수 없다.

나아가 이런 방식으로 문두루를 산 쪽으로 향하게 하면 산이 무너지고, 강이나 바다로 향하면 물이 마른다고 덧붙인다. 요컨대 문두루법에 의해 물과 불과 바람 등의 어떤 자연재해도 막을 수 있으며, 악한 사람도 자비로운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변모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가 말한 오방대신을 관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첫째가 단차아가(亶遮阿加)이니, 청색 옷을 걸치고 동방에 거(居)하면서 청기(靑氣)를 토한다. 둘째가 마가기두(摩呵祇斗). 적색 옷을 입고 남방에 거하면서 적기(赤氣)를 뿜어낸다.

세번째 오방대신은 이도열라(移兜涅羅). 흰색 옷을 입고서 서방에 거하면서 백기(白氣)를 뿜으며, 네번째 마하가니(摩하<言+可>伽尼)는 검은 옷을 입고 북방에 거하면서 흑기(黑氣)를 토한다. 마지막 오달라내(烏달<口+旦>羅내<女+爾>)는 황색 옷을 입고서 중앙에 있으면서 황기(黃氣)를 뿜는다. 이들 오방대신은 신장이 모두 1장2척(363.64㎝)으로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처는 문두루의 크기와 재목까지 지정했다. 이에 의하면 문두루는 크기가 77푼(23.33㎝)이며, 재목으로는 금은진보(金銀珍寶)가 가장 좋고, 그 다음이 전단목과 잡향목이다. 이런 내용을 요약하면 문두루법이란 재앙이 닥칠 때 오방대신의 이름을 둥근 나무에 적어 놓고 그것들로 문두루를 삼으면 모든 재앙과 악귀를 없앨 수 있다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밀교적인 냄새가 물씬한 불교 의례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군이 침략했을 때 명랑은 편법을 사용했다. 즉, 채색 비단으로 임시 절을 만들고 그곳에서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드는 방식을 구사했다. 그 원인에 대해 삼국유사는 "일이 급박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까지가 한국 불교사학계가 해명한 문두루법의 실상이다.

하지만 관정경에 소개된 문두루법은 인도권 불교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요소가 무수하다. 예컨대 세상을 동서남북의 사방으로 구획한 데서 유래한 사천왕(四天王)은 분명 팔리어 경전에도 보이는 인도적 요소지만, 여기에 중앙을 더하고, 나아가 각 방향을 관장하는 오방(五方)의 대신(大神)들이 각기 고유한 방위색의 옷을 걸치고 그 방향에 대응되는 색깔의 기(氣)를 뿜는다는 발상은 인도 불교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이는 중국의 오랜 사상 체계 중 하나인 음양오행설이 그 뿌리로 보인다.

또한 오방대신을 관조하면 악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발상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도교신학의 오장신(五臟神)을 차용한 것이다. 도교신학, 그리고 이와 밀접한 동아시아 전통의학에서는 간장ㆍ심장ㆍ비장ㆍ폐장ㆍ신장의 다섯 가지 장기(臟器)가 각각 신(神)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 정신을 집중해 그것들을 내성(內省)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으며, 궁극적으로 영생불사의 신선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와 같은 오장신 신앙은 후한시대에 출현한 초기 도교 경전들인 태평경(太平經)이나 노자하상공주(老子河上公注)에 이미 뚜렷이 보이며, 이후 도교신학의 주축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는다.

이런 점들로 볼 때 문두루법의 성전(聖典)이라 할 수 있는 관정경이란 밀교 경전이 서역 경전을 온전히 번역한 판본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관정경의 원본이 된 서역 경전이 있었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설혹 있었다고 해도 금시리밀다라의 번역 과정, 혹은 이후 경전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중국적인 요소를 가미해 성립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출처 - 경북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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